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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비수사> 아동 유괴를 소재로 한 영화

by 머리속은 꽃밭 2024. 1. 18.

영화 <극비수사> 포스터 (출처 : 나무위키)

 

 영화 <극비수사>는 2015년 6월 18일에 개봉한 한국 영화입니다. 

 곽경택 감독의 연출 작품입니다. 그는 1966년 5월 23일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뉴욕대학교 졸업작품으로 만들었던 '영창 이야기'는 군대 영창을 소재로 다룬 영화였는데, 이를 통해 1995년 제2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TV 드라마 스텝으로 연출 공부를 하다가 1997년 '억수탕'을 통해 영화감독으로 정식 데뷔했습니다. 몇몇 영화가 부산광역시를 배경을 합니다. 가장 대중적으로 유명한 것은 곽경택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인 2001년작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배우 김광규와 이시언을 발굴해 냈습니다. 김광규는 광경택이 강의하던 대학교에서 제자로 만나 강의 과제로 찍은 단편영화에 출연했던 모습을 보고 <닥터 K>에 캐스팅했습니다. 그리고 이시언은 <친구>, <우리들의 전설>에 캐스팅시키면서 활동명도 직접 작명해 만들어 줄 만큼 상당히 신경 써 준 배우라고 합니다. 김광규와 이시언 모두 부산 사람으로, 곽경택은 부산 출신 배우들에게 애정을 갖는 편이라고 합니다.

 이 영화는 1978년 부산광역시에서 실제로 일어난 정효주 유괴 사건, 그중에서도 1차 유괴 사건에서 모티브를 한 영화입니다.

 

 줄거리로는 1978년 부산 최고의 현금부자 성회장의 외동딸 성은주는 친구 민혜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길이었는데 한 남자가 두 아이에게 길을 물어보며 다가왔습니다. 그날 저녁, 은주네 집은 아이가 돌아오지 않아서 유괴임을 직감한 은주 부모는 비밀리에 형사를 불렀습니다. 형사는 재산을 노린 계획적인 범행으로 보고 주변 사람들을 모조리 밀착감시하기 시작하지만 아이가 없어진 지 열흘이 되도록 범인은 전혀 연락을 해오지 않았습니다.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 은주의 엄마(배우 이정은)는 점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는데 가는 곳마다 이미 아이가 죽어버렸다는 대답만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딱 한 사람 김중산(배우 유해진) 도사만은 아이가 아직 살아있고 15일 뒤 범인으로부터 연락이 올 것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한편, 경찰 역시 신속한 사건 해결을 위해 여러 가지 공로를 많이 세운 공길용(배우 김윤석) 형사를 투입시켰습니다. 하지만 공길용 형사는 아이가 잘못되면 독박 쓸 것이 두려워 관할이 달라 수사권한이 없다는 핑계로 사건을 거부하였습니다. 아내의 타박에 결국 아이 부모를 만났습니다. 아이를 찾아달라고 애원하는 은주 부모의 성화를 뿌리치지 못한 공길용은 특단의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경찰서 하고는 전혀 거리가 먼 엉뚱한 곳에 수사본부를 차리는 일명 극비수사를 해야만 아이가 무사히 살아 돌아올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알게 된 김중산과 힘을 합해 아이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범인에 대한 단서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 정효주 유괴 사건 

 1차 사건은 1978년 9월 15일 남성국민학교 2학년이었던 정효주가 귀가 도중 한 40대 남성을 만남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 남성은 정효주를 꼬드겨서 차 안에 올라타자 곧바로 차를 몰고 서울특별시로 올라갔습니다. 낯선 아저씨가 자신을 데리고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것을 알아챈 정효주는 차 안에서 울음을 터트렸고 범인은 그런 정효주를 다독였습니다. 이후 범인은 정효주를 데리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협박전화를 걸었고 효주를 시켜 돈을 부치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범인은 서울에 거주 중인 정효주의 이모와 협상하겠다고 통보하였습니다. 유괴 33일째 되던 날에 전화를 걸 공중전화를 물색하던 중 부산시경 소속 공길용 경사에 의해 검거되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습니다. 

 범인 매석환은 전과 9범을 기록했던 남자입니다. 그는 서울에서 거주하면서 자신의 자가용으로 불법 택시운전을 했는데 부산에서 내렸던 한 승객이 "남성국민학교에는 부잣집 자식들이 많이 다닌다."는 말을 했던 것을 듣고 곧바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밝혔습니다. 매석환은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투옥되었으며 1989년에 만기 출소했습니다.

1차 유괴 사건 이후 두 번째 유괴를 당했습니다. 그 원인은 언론에서 무분별하게 피해자인 여자아이의 실명과 다니던 학교를 그대로 보도하여 두 번째 유괴범이 피해자 가정이 부유층인 것을 알고 유괴한 것입니다. 

 당시 차량번호를 파악하기 위해 대한민국 최초로 최면수사기법이 동원되었고 차량 번호를 밝혀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실제로 공길용씨가 직접 영화제작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영화적 연출과 정효주의 이름이 가명으로 처리된 것을 빼면 실제 사건과 동일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공길용 경사와 김중산 도사도 실명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사건 피해자인 여자아이와 아이가 다니던 학교 이름은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