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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 최초의 현대적인 우리말사전

by 머리속은 꽃밭 2024. 1. 6.

말모이 메인 포스터 (출처 : 나무위키)

1. 영화 <말모이> 정보

 <말모이>는 2019년 1월 9일에 개봉한 한국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영화 <택시운전사>의 각본을 담당한 엄유나가 <말모이>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습니다. 이 영화의 모티브는 실제 사건으로 조선어학회 사건을 참조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일제에 의해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그때,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독립군, 독립운동가들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 위해 헌신하다 탄압당한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영화 속의  조선어학회 사건은 모티브만 가져왔고 대부분이 픽션입니다. 등장인물 역시 언급되는 작가들 말고는 모두 가상 인물입니다. 

 줄거리로는 1933년 만주, 주시경의 원고가 다시 발견되며 주시경 사망 이후 중단된 조선어 사전 작업이 재개됩니다. 1941년 대동아극장에서 일하던 판수는 전과자인 것이 들켜 극장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경성제일중학교에 재학 중인 아들인 덕진의 월사금이 밀려 제적 및 차압 조치를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월사금을 내야 하는 판수는 조 선생님의 조선어학회의 심부름꾼이 되었는데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문맹이라는 점입니다. 정환은 판수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중 수상한 판수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오해를 받은 판수는 화가 나서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미안한 정환은 자신의 아버지인 경성제일중학교 이사장인 류완택의 이야기와 민들레 이야기를 하면서 진심으로 사과하였습니다. 다시 조선어학회 일원으로 일하게 된 판수는 한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말의 소중함에 눈뜨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감시하에 사전을 완성하기 위해 전국 사투리를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고 정환은 일본제국 경찰의 협박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돈을 벌 목적으로 시작된 일이었던 판수는 알 수 없는 신념이 생겨 사투리를 모으는 데 큰 힘을 보태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말모이' 작업을 끝낼 수 있을까요?

 

2. 역사적 핵심 단어

 - 창씨개명의 시대

 창씨개명은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들을 일본식 씨를 창설하고 일본식으로 개명하여 일상생활에서 일본식 씨명을 사용하도록 정책적으로 강요한 일입니다. 

 영화의 배경인 1940년대는 일제강점기 최후희 교육령인 제4차 조선교육령이 공표된 시기입니다. 일본은 1910년 8월, 한일합병조약으로 조선의 주권을 빼앗기 이전부터 조선어 말살을 진행하였는데 그 첫 번째가 조선총독부가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해 초등학교에서 일본어를 국어 과목으로 가르치게 한 것입니다.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님은 이때부터 조선어 강습원을 열어 제자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습니다. 이루 1930년대에 일제는 조선의 학교와 관청에서도 일본어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강제하였고 창씨개명 등을 종용하며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 조선어학회

 학회의 시작은 주시경 선생과 여러 사람들이 모여 만든 '국어연구학회'를 시작으로 1908년 8월 31일입니다. 1921년 12월 3일에 <조선어연구회>로 재탄생하였습니다. 1927년 2월부터 기관지 <한글>을 발간하였습니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일본인 관변학자들을 모아 똑같은 이름의 '조선어 연구회'를 만들자, 1931년 명칭을 조선어학회로 바꾸었습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사되었으나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조선어학회의 주축을 이루던 학자들이 석방되면서 조직을 재건하였습니다. 유실된 줄 알았던 큰사전 원고가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어서  '조선말 큰사전' 사업을 재개하는 것이 가능하였습니다. 조선말 큰사전은 1974년 10월 9일(한글날) 제1권이 간행되었습니다. 한글학회는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사전을 편찬하고 있었는데, 1953년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한글 간소화 파동이 터져 한글 학회를 압박하며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막아 버렸습니다. 이 소동은 1955년 간소화 훈령이 철회되었습니다. 이후 1949년 한글날을 기해 이름을 '한글 학회'로 바꾸었습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1942년 10월부터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입니다. 정신적 측면에서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해 가고 있는데 한국인들의 저항을 탄압하여 한국인의 정신을 말살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조선어학회 관련 학자 33명이 검거되었고, 증인으로 48명이 붙잡혀 갔습니다. 이들은 검거 및 취조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 말모이

 말모이는 1910년대 편찬된 최초의 현대적 우리말사전 원고입니다. 말모이란 '말을 모은 것'이라는 의미로 오늘날 사전을 뜻하는 순우리말입니다. 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 등 언어학자들이 참여해 편찬되었습니다. 말모이는 1911년부터 조사를 시작해 초기 원고까지 만들었지만 출판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말모이 초기 원고는 후에 조선어학연구회로 넘어가 조선어 사전을 만드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 주시경 

 주시경은 개화기의 국어학자로, 우리말과 한글의 전문적 이론 연구와 후진 양성으로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개척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주시경은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서재필의 언문조필로 있었습니다. 1907년 지석영이 만든 국어연구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1908년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이화학당, 휘민의숙, 배재학당 등에서 강의를 하였습니다. 소리를 적는 문자인 기음문자와 뜻을 적는 문자인 기시문자를 나누고, 기음문자가 훌륭한 것이므로 한자 대신 국문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최초의 국어사전인 <말모이>를 제자들과 편찬하였습니다. 정부는 주시경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