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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 생각할 사 思 슬퍼할 도 悼 사도세자

by 머리속은 꽃밭 2024. 1. 5.

영화 <사도> 포스터 (출처: 나무위키)

1. 영화 <사도>에 대하여

<사도>는 2015년 9월 16일에 개봉한 한국 영화입니다.

 이준익 감독님은 임오화변을 주요 소재로 한 <사도>를 제작하였습니다. 그는 <왕의 남자>, <라디오 스타>, <황산벌>, <동주> 등 대중성, 작품성, 흥행 등을 모두 잡은 감독으로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감독님입니다. <사도>는 약 625만을 기록해 상당한 흥행을 거머쥐었습니다. 감독님은 이 영화와 <동주>로 2016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부문 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이준익 감독님은 <사도>에서 영조와 사도세자에 대한 대중적 통념을 벗어나 두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왜 사도가 뒤주에 갇혔고 부자 사이가 틀어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집중하려고 하였습니다.

 시대적 배경은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죽는 임오화변입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고 점차 의식을 잃어가는 8일 동안의 시간을 순차적으로 진행하면서 사도세자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영조의 관계가 틀어지고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의 상황을 동시에 그려냈습니다. 

 간단히 줄거리를 말하자면 1737년, 3살인 세자는 '사치'라는 뜻을 깨우칠 만큼 총명한 그를 보며 영조는 흡족해하였습니다. 1744년, 10살인 세자는 그림이나 그리며 공부를 게을리하는 세자의 모습에 섭섭하여 꾸중을 하였습니다. 1749년, 15살인 세자는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습니다. 부왕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당당하고 단호만 모습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인원왕후를 포함한 왕실 일원들은 세자의 결단력에 기뻐하였지만 영조는 세자가 자신이 쌓아 놓은 조정의 탕평을 무너뜨렸다며 세자를 질책하였습니다. 이후로도 영조의 세자를 향한 어처구니없는 질타는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세자는 무엇 하나 자신의 생각에 따라 결정하지 못하고 영조의 눈치만 살피게 되었습니다. 점점 멀어지는 영조와 세자의 사이 비극적인 가족사를 다루었습니다. 

2. 역사 속 영조 - 임오화변 - 정조

 영조는 조선의 제21대 군주로 숙종과 인현왕후를 모시는 몸종이자 궁녀의 옷을 빨던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비 최 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왕실 최초로 유일하게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로서 왕위에 오른 국왕입니다. 혈연적으로 숙종의 아들이지만 공식적으로는 경종의 이복동생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영조는 서출이자 방계로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정통성에 큰 약점이 있었습니다. 형 경종의 재위도중에 신임옥사가 일어나면서 죽을 위기에 놓인 적이 있었습니다. 1724년 30세 늦은 나이에 즉위하였지만 영조의 치세는 52년에 달하는 조선 왕사에 있어 최장 집권에 해당하며 역대 조선의 국왕 중 가장 장수한 군주입니다.  

 영조 38년 (1762), 조선의 국왕 영조가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잠시 평민으로 폐위시킨 뒤 뒤주에 8일간 가두고 굶겨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임오년에 일어나 '임오'와 비상시적인 재난이나 변괴를 뜻하는 '화변'을 넣어 임오화변이라 하였습니다. 왕이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인 아들을 잔혹하게 죽음으로 몰아간 사례는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입니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슬퍼하여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알려졌지만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조는 세자가 죽음으로써 과오를 뉘우쳤다고 판단하고 세자가 죽을 때 나이가 28세로 젊었기 때문에 딱 맞는 시호를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사약이나 교형이 아닌 뒤주에 가둬서 죽인 이유는 세손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그 근거로 영조가 세자를 살려둘 생각이 없어 보이고 세자에게 자결을 종용하였습니다. 공식적인 형벌로 죽는다면 세손뿐만 아니라 사도세자의 모든 자식들의 정통성을 잃습니다. 그렇기에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임으로써 아버지로서 아들을 훈계하다 벌어진 사고사 정도로 처리하려 한 것입니다.

 정조는 조선의 제22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입니다. 영조 28년(1752년)에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 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전에 형 의소세손이 요절하여 실질적 장남이었습니다. 영조 35년(1759년)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되었고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자 요절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 대리청정을 하여 국가의 정사를 직접 관장하다가 할아버지 영조가 81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2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4년간 재위하였습니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조선 후기의 대표 명군과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을 만들어낸 혼군이라는 상반된 평을 모두 받고 있는 한국사의 주요 인물입니다.

 

3. 역사 속 영조와 세자의 갈등의 원인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 원인을 찾자면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선천적인 기질의 차이와 둘은 두 사람이 처했던 성장 배경과 정치적 환경의 차이입니다. 

 선천적인 기질로 첫 번째 외형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 다른 게 무골이었습니다. <영조실록>에서 고조할아버지 효정과 닮았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힘도 세고 무예에 관심이 많았으며 외유나 사냥을 했던 점을 보면 효종처럼 몸집 자체가 크고 다부진 근육돼지 체형이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영조는 가늘고 호리호리한 체격을 보여 주었습니다. 조상 핏줄 덕에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고 운동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선호하진 않았습니다. 영조의 주요 관심사는 글공부였습니다. 두 번째로 성격입니다. 외부의 요구에 느슨히 대응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엔 활달하고 과감한 사도세자와 달리, 영조는 매사 조심스럽고 신중하지만 기민하고 민첩한 성격으로 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이 확연히 달랐습니다. <실록>을 보면 영조가 대리청정을 하는 세자에게 너무 조심성 없이 일을 막 처리한다고 나무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성장 배경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영조는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기록도 빈약하고 형편없이 격이 낮은 집안이었기에 영조는 왕세자로서의 대우나 조기 제왕학 수업을 받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장희빈의 소생인 경종이 세자로서 대리청정하던 10년의 기간과 경종으로부터 왕세제로 책봉받은 뒤 왕이 되기까지 5년까지 도합 15년여를 항상 불안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즉위 후에는 전국적인 반란인 이인좌의 난까지 겪고 재위 내내 경종 독살설에 시달려야 하였습니다.  이처럼 영조는 생애는 태어나면서부터 궁정 암투 한복판에 있었서 약점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정치적인 행동이나 튀는 걸 자제하고 스스로 공부에 매진하여 모범적인 세제로 행동해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아니었습니다. 사도세자는 태어날 때부터 당연하게 왕위계승자이었습니다. 잠재적인 경쟁자인 남자 형제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성장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지지자들이 많았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가족도 많았습니다. 사도세자는 과거의 영조처럼 목숨을 위협할 만큼 절실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